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묘당도이충무공유적

(廟堂島李忠武公遺蹟)
사적 | 사묘¸제단 | | 1963.01.21
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산58 | 조선시대 | 국유 | 완도군

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(1545∼1598) 장군과 명나라 장수 진린(陳璘)의 군사들이 힘을 합해 왜군을 물리쳤던 장소이다. 충무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던 때에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여수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고 군비를 늘리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. 선조 25년(1592)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포대첩¸ 노량진해전¸ 당항포해전¸ 한산대첩 등 곳곳에서 전승을 거두었고¸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대첩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. 그가 죽은 후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¸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¸ ‘충무(忠武)'라는 시호가 내려졌다.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선조 31년(1598)에 이순신이 약 8¸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을 쳤고¸ 그 해 7월에 명나라 장수 진린이 약 5¸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하였다. 가까이에 있던 이곳 묘당도에 진을 치면서 두 나라의 군사가 힘을 합하게 되었는데¸ 이후 7개월간 이곳은 조선과 명나라의 해군 본부가 되었다. 지금 이곳에는 이충무공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충무사가 있고¸ 보호하는 절의 의미를 띤 옥천사가 나란히 있다. 충무사는 진린이 꿈에 나타난 관운장을 제사지내어 장병들의 무사함을 기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하는 관왕묘에서 유래한다. 옥천사는 현종 7년(1666)에 처음 지어졌는데¸ 관왕묘를 보수공사하면서 그 옆에 수호와 제사를 맡게 하기 위해 암자 하나를 지었다고 한다. 일제시대에 관왕상과 위패·각종 유물들이 바다에 던져졌고¸ 옥천사의 불상만이 가까운 백운사에 옮겨져 보관되었다. 광복 후에는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충무사를 짓고¸ 이충무공을 모시게 되었다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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